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트비히 4세(신성 로마 제국) (문단 편집) == 초기 생애 == 라인 [[궁정백]]이자 상바이에른 공작이었던 루트비히 2세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자 [[독일왕]] [[루돌프 1세]]의 딸인 메히틸트의 차남으로 이미 성년이었던 형 루돌프가 있었기에 계승권이 없었다. 1294년 부친의 사망후 모친과 형의 보호를 받았으나 독일 왕위 선출에 위한 정치 암투에 휘말렸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는 [[아돌프(신성 로마 제국)|나사우의 아돌프]]였으나 전 [[독일왕]]이였던 루돌프 1세의 아들 [[오스트리아 공국|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알브레히트]]와 대립하는 중이었다. 당시 라인 궁정백이자 상바이에른의 공작이었던 루돌프는 나사우의 아돌프의 딸 마틸데와 결혼한 계기로 아돌프 편을 들었고 어머니였던 메히틸트는 자신의 동생인 알브레히트를 지지했다. 그녀는 차남이었던 루트비히를 [[뮌헨]]에서 멀리 떨어진 [[오스트리아 공국]] [[빈(오스트리아)|빈]]에 자리잡은 [[호프부르크|동생의 궁전]]으로 보냈다. 루트비히는 외삼촌의 궁전에서 외사촌인 프리드리히·레오폴트와 함께 자라났다. 훗날 그가 황제로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친인척들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하지만 그의 어릴 적 성장환경은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1298년 7월 2일 괼하임 전투에서 알브레히트가 나사우의 아돌프에게 승리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정계에서 그의 형 루돌프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루트비히는 법적으로 자신의 것이지만 그간 형의 방해로 갖지 못했던 정부 내의 직책을 얻었다. 이후 1308년 외삼촌 알브레히트 1세가 영지 문제로 조카인 [[슈바벤]]의 요한에게 암살당하면서 형 루돌프와 다시 충돌하였으나 1년 뒤 영토를 분할하면서 잠시나마 화해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하바이에른의 사촌들에 대한 후견인 자격을 내세워 분할 협상을 유리하게 타결지을 수 있었으나 하바이에른이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와 반목적인 관계였기에 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분쟁이 일어났다. 1313년 6월 다시 한번 형 루돌프와 타협을 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해 8월 [[룩셈부르크 가문]]의 [[황제]] [[하인리히 7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같은 해인 11월 9일에 가멜스도르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패퇴시켰다. 그뒤 그는 하인리히 7세의 사망 후 비어버린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에 관심을 돌렸다. 그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나 제위는 독일왕이나 황제가 붕어한다면 백작 이상급의 영주들이 후보로 나서 유력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와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 또한 백작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비록 [[대공위시대]] 이전까지 몇몇 유력 가문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제위를 차지하였으나 가계가 단절될 시에 다시 제후들에 위해 선출되었다. 일단 루트비히 당시에는 백작급 영주들은 더이상 후보 자격에 들지 못했으며 대신 합스부르크 가문과 룩셈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두고 다투고 있는 실정이었다. 허나 1314년 루트비히는 형인 루돌프와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이자 [[보헤미아 왕국]] 국왕이던 [[얀 루쳄부르스키]]를 제치고 후보가 되어 외사촌인 프리드리히와 경쟁하게 된다. 1313년에 있던 하바이에른에서의 분쟁에서 패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루트비히에게 큰 원한을 가져기에 거센 반대를 받았다. 그해 10월 루트비히는 외조부의 난적이었던 [[마인츠]] 대주교 페터 폰 아스펠트의 선동 덕택에 아스펠트, [[트리어(독일)|트리어]] 대주교 발두인[* 하인리히 7세의 동생이자 얀 루쳄부르스키의 숙부.], 합법적인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얀 루쳄부르스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발데마르, 작센의 계승권을 두고 경쟁하던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요한 2세 등을 포섭해 5개의 표를 얻었다. 경쟁자인 프리드리히 또한 이미 폐위당한 전 보헤미아 국왕이었던 [[인드르지흐|케른텐 공작 하인리히]], [[쾰른]] 대주교 하인리히 2세, 루트비히의 형인 라인 궁정백 루돌프,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 등에게서 총 4개 표를 얻었으나 근소한 차이에 낙선하고 말았다. 하나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했다. 루트비히는 페터 폰 아스펠트의 도움으로 재빨리 [[아헨]]에서 독일왕으로 즉위하였으나 프리드리히 또한 하인리히 2세의 도움으로 쾰른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사실상 대립왕이 되었다. 두 왕은 장장 7년 동안의 분쟁을 치루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